교회를 위한 철학자, 제임스 K.A. 스미스

현재 미국 칼빈대학 학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제임스 K. A. 스미스는 북미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시나브로 중요한 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특별히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Who’s Afraid of Postmodernism?>(살림), <급진 정통주의 신학 Introducing Radical Orthodoxy>(기독교문서선교회),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s to a Young Calvinist: An Invitation to the Reformed Tradition>(새물결플러스), <해석의 타락 The Fall of Interpretation>(대장간), <신학 공부를 위해 필요한 101가지 철학 개념 101 Key Terms in Philosophy and Their Importance for Theology>(도서출판100)과 같이 특정 철학이나 신학의 흐름, 개념 등을 스미스 특유의 재기 발랄한 필체로 소개하거나 교과서적으로 해설하는 책을 필두로, 최근 그 나름의 독창적 사상을 담은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에 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Desiring the Kingdom>·<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Imagining the Kingdom>(IVP)(3부작 마지막 작품 <왕을 기다리라 Awaiting the King>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와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반 삼아 욕망과 습관을 통해 형성되는 영성의 문제를 다룬 <습관이 영성이다 You are What You Love>(비아토르)의 연이은 출간에서 비롯한 현상일 것이다.
특별히 그의 가장 최근 저술 가운데 하나인 <습관이 영성이다>는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Love)’라는 원제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 세계관이나 하나님나라 같은 다소 거대 담론에 가까운 틀을 벗어나 신앙의 성숙과 신앙적 주체성의 면모를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더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스미스의 다양한 작품이 널리 회자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스미스라는 인물 자체가 가진 특성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담론의 심연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다소간 깊은 성찰과 숙고를 함축한 사상가라면, 그가 누구이건 간에 그 사상가의 삶 이야기가 저술 곳곳에 서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 점에서 스미스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개략적 탐구는 그의 작업을 더 잘 이해하려는 모든 이에게 분명 유익이 될 것이다.

신앙 여정과 철학자로서의 훈련

어느 정도 학문적 성취를 이룬 학자들은 대부분 크게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부족함 없는 중산층으로서의 삶의 환경이나 교육을 강조하는 집안 분위기 가운데 성장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스미스에게는 그렇게 학문에 깊이 관심을 가질 만한 가정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엠브로 출신인 스미스의 가족들은 평범한 노동자였고, 대학에 진학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무관한 삶을 살던 이들이었다. 오히려 그가 신앙과 신학,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아내인 디애나의 가족(디애나가 아닌!)의 권면 덕분이었다. 대학교 4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여름, 후일 자신의 아내가 될 디애나와 교제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디애나의 가족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같은 해 10월, 그는 디애나 가족의 설득에 넘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히려 디애나는 자기 가족과 스미스가 공유하는 신앙을 불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순간이기는 했지만 이는 스미스와 그녀의 관계를 끝장낼 수 있는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실제로 스미스는 이때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가 헤어졌거나 그녀가 주님께로 돌아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결국, 2년 후 결혼에 이른 두 사람은 네 명의 아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스미스는 여전히 자신의 아내를 자기 삶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1)
캐나다 온타리오주 워털루에 소재한 워털루대학교(University of Waterloo)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낸 스미스는 복음주의적 학교인 미국 아이오와주 엠마오성경대학(Emmaus Bible College)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다. 그리고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개혁주의 기독교 학문 연구의 산실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에 진학하여 철학 전공 석사과정 공부를 수행하는데, 이 시기 스미스는 자신의 신앙을 형성하게 한 오순절 신앙과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 전통 사이를 오가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석사과정 중의] 나의 일주일은 좀 괴상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칼뱅과 카이퍼와 도이어베르트의 말에 다이빙하여 개혁주의 전통의 지적 자원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런 다음 주일에는 오순절 교회에 나갔다. 솔직히 말해서, 그 오순절 교회는 때때로 꽤 광적으로 흘러갔다. 토론토에서 스트래트포드까지는 참으로 먼 길이었다. 내 말은, 제네바(칼뱅의 개혁주의가 발원한 곳 – 편주)에서 아주사 스트리트(Azusa Street, 현대 오순절 운동의 발원지 – 편주)만큼 먼 거리였다는 뜻이다.”2)
이런 이질적인 전통의 경험에서 그는 많은 글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유럽 대륙철학에 조예가 깊은 제임스 올타이스(James Olthuis)의 지도 아래 석사 학위를 받고, 다음으로, 특별히 여러 철학자 가운데서도 하이데거와 데리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삼아 자신만의 고유한 포스트모던 종교철학을 발전시킨 미국의 유럽 대륙철학 연구 분야의 대가 존 D. 카푸토(John D. Caputo)의 지도 아래 빌라노바대학교(Villanova University)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에 이른다. 특별히 스미스는 카푸토의 해체론적 신학과는 다소간 거리를 두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카푸토의 열렬한 헌신과 텍스트 독법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이것이 훗날,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복음주의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장 개방적인 학자들 가운데 하나로 활동하게 만들어 준 자산이 된다.

신학적-철학적 배경

이미 언급한 것처럼 토론토 기독교학문연구소에서의 훈련에서 큰 영향을 받은 스미스에게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도이어베르트를 위시한 개혁주의 세계관과 신학은 오늘날 그의 사상을 형성하게 한 핵심 원천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를 지배한 요소에는 개혁신학뿐만 아니라 오순절 신앙과 포스트모던 철학도 있다.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서로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혁주의 신학과 오순절 신앙, 포스트모던 철학은 과연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래디컬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보통 급진 정통주의로 번역되지만, 이 번역이 타당한지 내겐 여전히 의문이다. 여기서 Radical은 뿌리, 근본에 해당하는 라틴어 radix에 연원한 것이고, 실제로 이 진영에 속하는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근본 내지 근원을 재정립하는 작업에서 파생되는 급진적 효과를 노린다. 즉, 근본에 대한 재규정이 이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다)에 대한 그의 수용이다. 스미스는 개혁파 신학과 철학의 전통에 머무르면서도 존 밀뱅크(John Milbank), 캐서린 픽스톡(Catherine Pickstock),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로 대변되는 래디컬 정통주의를 매우 포괄적으로 수용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한 그리스도교 정통주의 철학과 신학을 통해 독단적-세속주의의 대안으로서의 신앙과 신학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찰하는 작업을 내놓는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그는 래디컬 정통주의에 매우 긍정적이면서도 자신의 본래 신앙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래디컬 정통주의는 기본적으로 신플라톤주의로 대변되는 초기 기독교의 초월에 대한 야심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고대 후기나 중세 신학과 단절하려는 일군의 개혁파 신학과는 이질적인 형태를 취한다. 또한 이 진영은 신학의 포스트모던적 전환을 강조하면서도 그 전환의 추동력을 고대‧중세 철학의 초월에 대한 욕망 내지 신비를 함축할 수 있는 이원론적 철학에서 찾기 때문에, 현대 유럽 대륙철학을 기반으로 삼는 여러 종교철학적 시도에 대해서도 그들이 여전히 너무 철학적이라는 데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런 맥락에서 스미스는 칼뱅과 칼뱅주의 전통을 떠나려고 하지도 않고, 데리다나 리오타르, 마리옹과 같은 현대의 철학자에 대해서도 매우 호의적이기에 래디컬 정통주의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래디컬 정통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부분을 찾자면,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현대적 재발견과 (제도가 아닌) 보편적 신앙으로서의 보편적인 공교회적 전례를 통한 초월과 신비의 회복에 대한 강조다. 바로 이 요소를 통해서 스미스는 근대적 세속성의 내재주의나 개신교에도 스며든 주지주의를 극복하려고 하며, 이런 점에서 자신이 공부한 개혁주의 세계관이나 오순절 신학, 포스트모던 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 및 철학과 공명한다고 본다.
이러한 근거의 요체로서 스미스가 전유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합리성을 인간의 심연에서부터 규정하는 근원적 욕망으로서의 신앙과 습속을 근본으로 삼는 태도, 곧 사랑의 질서를 통해 이성을 재규정하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신앙주의다. 이러한 신앙주의는 이성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삼아 신앙을 설명하거나 신앙과 이성의 영역을 첨예하게 구별한 다음 그 둘을 어설프게 조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이성적 이해에 앞서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이나 사랑이 인간성 형성, 더 크게는 교회 공동체의 형성의 핵심 기제가 된다는 점을 함축한다. 적어도 스미스에게는, 이러한 강조점이 오순절에서 강조하는 체험적 신앙의 열광주의에 대한 긍정적 전유,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전-이론적 세계관 형성의 심화, (조금 단순화한) 포스트모던 철학에서 감행한 근대적 자율성, 세속화에 대한 해체 작업을 가속화할 수 있는 근본 추동력으로 간주되었다. 래디컬 정통주의를 경유하는 가운데 만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며, 그 사랑의 결과물은 2019년 출간할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도상에서 On the Road with Augustine, Brazos Press>에서 정점을 찍을 것으로 보인다.

교회를 위한 철학자로서의 스미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다음 로욜라메리마운트대학교(Loyola Marymount University) 철학과 조교수로 3년의 시간을 보낸 스미스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칼빈대학 철학과에 재직하는 가운데 본격적으로 ‘교회를 위한 철학자’다운 연구 결과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한다. 워낙 많은 책을 내놓기로 유명한 그이지만, 우리는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작품군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세속화 이론과 같이 현대의 주요 사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제안하는 일련의 연구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 사조에서 그리스도인과 공동체의 온전한 재-형성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작품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서는, 한국에서도 출간한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를 시작으로 <악마는 데리다를 읽는다: 그리고 대학, 교회, 정치, 미학에 관한 다른 소론들 Devil Reads Derrida – and Other Essays on the University, the Church, Politics, and the Arts>, <누가 상대주의를 두려워하는가? Who’s Afraid of Relativism?> 등이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스미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복음주의 교회의 패러다임을 변경하고자 한다.
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만 등장하면 일단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 사상’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을 씌우려고 하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의 주류 복음주의 그룹에서 흔히 보여 주는 태도다. 스미스는 이것이 교회를 위해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 아래 미국에서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부로 통하는 데리다나 리오타르 등의 사상을 쉽게 해명하여 그들이 진심으로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그들의 작업이 교회에 던져 주는 시사점을 제공하는 대담한 작업을 수행했다.
이를테면 그는 데리다의 문제의식은 진리 자체를 상대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진리 담론 속에 내포한 타자성에 대한 배제를 폭로하려는 것이고, 리오타르 역시 거대 담론을 통해 배제되는 ‘차이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게 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보여 주어, 이러한 사상들이 약한 것을 통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내포한 가치와 공명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특별히, 유달리 악명 높은 상대주의 역시도,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내세우는 상대주의적 담론이 진리 자체를 무차별적으로 상대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 담론의 형성에서 작용하는 요인들 자체의 유한성이나 상대성으로 인해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상대적이고 유한한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시도라는 점을 짚어 낸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전유하면, 피조물 자체가 이미 죄로 인해 진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고, 우리 각자가 특정 문화나 배경, 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진리의 일면만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잘 이해해 본다면,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의 문제의식과 진리 앞에 선 인간의 겸허한 신학적 태도는 얼마든지 공명 가능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된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과 더불어 그는 세속화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사회 및 후기-세속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를 함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작업들을 펼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급진 정통주의 신학> 역시 이 진영에서 시행하고 있는 세속화에 대한 비판 작업과 그 대안으로서의 교회의 근원적 전통을 담아내는 전-근대성에 대한 현대적 전유를 소개하는 작업이었는데, 이보다 더 실천적이고 직접적인 형태로 나온 작품이 2012년 출간한 <근대성 이후?: 세속화, 세계화, 그리고 세계의 재주술화 After Modernity?: Secularization, Globalization, and the Reenchantment of the World>와 2014년 선보인 <세속화하(지 않)는 법: 찰스 테일러 읽기 How (Not) to Be Secular: Reading Charles Taylor>이다.
스미스는 이 두 작품에서, 한편으로 근대성이 전제하는 중립적 이성의 신화화와 비-종교성에 대한 일방적 찬사가 담고 있는 역설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세속화가 교회에 준 선물이 무엇이며, 세속화를 바라보는 합당한 자세가 과연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자 한다. 특별히 <세속화하(지 않)는 법: 찰스 테일러 읽기>는 캐나다 출신의 공동체주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명저 <세속의 시대 A Secular Age>를 매우 명쾌하게 해설한 것은 물론이고, 테일러의 통찰을 그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교회가 처한 현실에 적용한 작품이다. 이 작업을 통해 스미스는, 테일러가 제시한 근대의 성과, 곧 전-근대적 종교가 지닌 미신적 성격을 폭로하고 그것을 축출해 낸 성과를 그리스도인들 역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역시나 테일러를 따라서, 스미스는 세속화가 그 이전의 초월의 이념을 몰아내면서 성취한 내재주의나 배타적 인간주의 역시 또 하나의 신념 체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세속적 근대성은 단적으로 종교적인 것과 무-종교적인 것, 합리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도래와 더불어 꽃핀 사회적 상상을 기반으로 삼아 형성된 새로운 신념들의 각축장을 형성해 낸 운동이었고, 이처럼 여러 신념이 경쟁을 벌이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스미스의 제안이다.
다시 말해, 스미스는 비-종교적인 것에 우위성을 두는 세속주의가 내재주의에 대해 보인 일방적 찬사가 다양한 신념들을 이성의 중립성 아래 공존케 하여 종교와 신념의 자유를 가능하게 한 세속화의 성과를 역설적으로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다만 교회는 세속화의 이런 부정적 측면에 대한 비판을 넘어, 세속화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의 초월에 대한 욕구나 욕망, 신비에 대한 관심에 대해 교회가 교회 본연의 신비와 초월의 이념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또한 세속화에 대한 그의 중요한 제안이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근래 들어 더 구체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데, 한 예로, 스미스는 근대의 탁월한 성과 가운데 하나인 과학적 진보 및 발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화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탁월한 정치신학자 윌리엄 캐버노(William T. Cavanaugh)와 공동으로 편집한 <진화와 타락 Evolution and the Fall>이다. 또한 그의 대표적 작업 가운데 하나인 <왕을 기다리라>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신학 및 공공신학의 논의를 전개하여, 후기-세속 사회에서 일어나는 공적 담론과 다양한 정치적 현실에 대한 교회의 적절한 정치적 반응의 기초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으로, 동시대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바람직한 정치적 자기-규정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스미스는 우리가 처한 공간적 현실이 매우 예전적임에 주목하면서, 우리의 정치적 공간의 예전적 형성 내지 재형성 가능성을 모색한다.
여기에 더하여, 그의 사유의 모험 가운데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신앙 공동체의 재형성을 촉구하는 그의 문화적 예전 3부작이다. 이 작업을 통해 그는 그동안 복음주의-개혁주의 교회가 끊임없이 견지해 온 주지주의적 훈련 방식의 문제점을 알리고, 그리스도인을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의 심원한 욕망의 발현에서 주조된 습관적 실천에 대한 개혁이 필요함을 제안한다. 특별히 이 맥락에서 스미스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행동 지향, 곧 지적-이론적 지향에 앞서 우리의 심연을 좌우하는 몸과 마음의 지향적 태도를 변경할 수 있는 것은 예배 공동체의 전례적 실천이라는 점을 스미스 자신에게 익숙한 현대 유럽 대륙철학의 사유(특별히 현상학!)와 공교회적 전례의 재발견을 통해 입증한다.
필자는 스미스의 여러 작업들 가운데서도 바로 이 작업이 신앙인들―대체로 복음주의/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이들―에게 매우 직접적인 도전을 주는 시도라고 본다. 지금까지 보통의 복음주의-개혁주의 교회는 교회 성장과 교인들의 성숙을 위해 제자 훈련을 비롯하여 온갖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해 왔다. 심지어는 온 교우가 함께하는 예배보다도 훈련 프로그램의 진행이 해당 공동체의 존재 이유라도 되는 듯 여기에 교회의 생사生死 여부를 거는 모습까지 보여 왔다. 이에 정작 예배 공동체로 모이는 교회의 주된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의 예배 의식의 중요성은 망각되었고, 교회의 표지인 세례와 성찬례조차 그 의미에 대한 깊은 숙고는 상실된 채 교회의 연례행사 가운데 하나 정도로 축소되어 실행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의 논의는 비록 한계―뒤에서 논할 것이다―는 있지만 교회 예전이 함축하는 변혁적 잠재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 잃어버린 예전의 신비에 다가설 수 있는 이론적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과 관련해서, 나는 그를 기독교 철학자로 부르기보다 ‘교회를 위한 철학자’로 부르고 싶다. 기독교인 철학자의 바람직한 모형은 단지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에 입각해, 기독교적 정신을 반영하는 철학을 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 철학 자체를 주조해 내고 실천하는 기독교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앨빈 플랜팅가와 같은 이가 보여 주는 강한 입장과는 다르게, 스미스는 기독교 철학 자체를 보여 주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그는 교회를 위해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교회를 위해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계속 물어 가는 가운데 본인의 고유한 사유의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 그 결실이 바로 교회를 위해 필요한 포스트모더니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세속성에 대한 반성, 교회를 위해 필요한 문화적 예전에 대한 제안들인 것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스미스를 통해, 기독교적 학문 연구라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고 필요하다면, 기독교적 학문이라는 고유 영역을 적극 만들기보다 일반 학문의 문법과 성과에 충실하게 귀를 기울인 다음 그 성과를 전유하는 가운데 교회를 위해 필요한 전망과 혜안을 학문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기독교적 학문함의 또 다른 실천 방식이 될 수 있음을 구체적인 형태로 배울 수 있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의 작업 방향을 매우 잘 보여 준다. “나의 작업은 단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신학, 그리스도교 철학, 교회의 예배와 제자도의 생생한 실천을 위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선별하는 일과 관련한다.”3)

여러 함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언급한 여러 함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미스에게서 여러 아쉬운 점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철학자로서 한계에 관한 문제이다. 분명 철학자로서의 상당한 수련을 거쳤고, 그가 주로 훈련한 현상학이나 해체론, 종교철학에 대해서 상당한 수준의 이해도를 보여 주지만, 그 외 여러 철학자에 대해서 스미스가 보여 주는 이해는 제한적인 수준을 넘어 심한 경우 왜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망스러운 독해를 담고 있다. 한 예로,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에서 제시한 푸코 해석은 푸코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수준의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여기서 스미스는 푸코가 제안한 권력-지식 관계의 미시적-무의식적 역학에 대한 계보학적 고찰이 담고 있는 함의에는 주목하지 않은 채, 그가 모든 권력 내지 권위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다는 식의 이상한 비판을 하고 있다. 오히려 푸코는 우리의 지식과 담론이 권력과의 관계망 속에서만 형성된다는 점을 시대별로 형성된 텍스트 이해와 배치를 통해 보여 주는 데 치중한다. 이 맥락에서 권력과 권력과의 관계 속에 형성된 지식 담론은 각 시기별로 상이하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권력 자체가 긍정/부정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리오타르와 관련해서도, 스미스는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담고 있는 긍정적 차원을 잘 짚기는 하지만,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이외의 주요 저술, 곧 <쟁론 Différend>이나 종교와 신앙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La Confession d’Augustin> 등의 책에 세심하게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간 피상적인 이해를 보여 준다.4)
이는 그가 지나치게 교회를 위한 철학에만 몰두한 나머지 해당 철학자들에게서 교회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나 비판점을 성급하게 도출하려고 한 결과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스미스의 철학 이해와 해석을 선별해서 수용하는 가운데, 교회를 위한 철학이 교회를 위해 유의미할 수 있지만 철학 자체에 대한 건전한 접근인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의문을 품어야 한다.
또한 문화적 예전 시리즈에 나타난 그의 예전에 관한 논의에도 아쉬운 대목이 있다. 그가 전형적인 예전 또는 전례학자가 아니기에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지만, 스미스의 논의는 교회 전통 가운데 형성된 예전이 지닌 깊은 함의를 공교회적 시각에서 일관성 있게 보여 주기보다는 가톨릭, 성공회, 개혁파 교회 등 각각이 전하는 전례에 대한 통찰을 취사선택해서 나열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하지만 가톨릭, 성공회, 개혁파 교회에서 각각 나타내는 전례의 강조점에는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신학적 차이가 담겨 있다.
가톨릭이나 성공회 교회가 왜 개신교회보다 성찬례를 중요시하는지, 왜 여전히 성사의 신비를 강하게 견지하는지, 그리고 제대의 위치나 (개인 기도나 대표 기도가 아닌!) 공동 기도의 선택과 실행, 전례력의 보존 등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예배 시 춤의 도입을 반대하는 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의식의 집전에서 인도자의 위치나 방향, 참여자들의 착석과 기립의 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등의 주제를 포괄적으로 들여다봐야 통전적인 형태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의 전례 가운데 일부는 거부하고 일부는 수용한 데도 그 나름의 신학적 이유가 있으며, 20세기 들어 가톨릭교회가 전례 의식에 대한 총체적 개혁을 기도한 데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5) 스미스도 간혹 개혁파가 보여 준 중세 가톨릭교회 예전을 비판한 이유나 특정 전례 요소의 심원한 의미를 언급하긴 하지만, 교파들의 예전에 담긴 함의와 독특성을 섬세하게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다양한 상품을 보유한 마트의 가판대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제품을 고르듯, 각 교파의 예전에서 배울 만한 요소들을 나열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 여러 전례에 담긴 고유한 특징에 깊이있게 다가가지 못한다. 이는 스미스가 공교회적 전례의 보편성 내지 공통성에 잘 주목하긴 했지만, 공교회성의 또 다른 측면, “다양성 안에 일치(unità nella diversità)”의 요소까지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한계가 아닐까 한다.6)
물론, 나는 스미스가 감행한 공교회 예전을 재발견하기 위한 시도에 크게 공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양한 교회 전통에서 형성된 전례의 공통성을 온전히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서로가 지닌 독특한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고찰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개신교회가 얼마나 가톨릭이나 성공회 전례를 곡해하고 폄훼했는지(많은 이가 여전히 그것을 미신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 전통의 전례는 너무나도 신학적이다), 또 동방교회 전통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심지어는 개신교 교파들 사이에서도 서로 간에 얼마나 심한 오해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런 차이에 대한 고려를 기반으로 삼아 오늘날 예전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깨달음이 있은 다음에야 각 전례 요소의 특징과 그 중요성이 더 온전히 수용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의 시도의 방향 자체는 분명 참신하지만, 차이를 인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는 반성과 성찰이 다소 결여되어 있기에 그의 논의는 기존 개신교 전례의 문제점을 심도 있게 밝혀 주지 못하며, 더 나아가 다양성 안에서 통합과 일치―차이 없는 통합은 얼마나 공허한가?―를 기대하는 공교회성의 또 다른 함의로 다가가지 못한다. 이 문제의 연장선에서, 스미스가 예배와 예전을 인간성 재형성을 위한 기능적 차원으로 환원해 접근하는 태도를 취한 것에도, 우리는 그것이 자칫 예전을 교육적 필요를 위한 도구로 삼는 태도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적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물론 전례에 교육적 기능이 담길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발터 카스퍼의 말을 더 강조하고 싶다. “미사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절대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미사는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봉사한다.”7) 이 말을 그대로 받아서 우리는 ‘예배 그 자체가 목적이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교육적 효과와 습관의 재형성이라는 예배의 파생적 효과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인간의 습관 재형성보다 더 심원한 신적 영광의 드러남과 구원 신비로의 참여에 예배와 전례의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참된 예전적 인간론은 습관의 재형성이 아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예배와 예전의 신비에 압도되고 당혹해 하는 수동적 자기성의 가능성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8)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던 그의 작업의 특징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 스미스를 읽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더군다나 이제 50세도 채 되지 않은 그의 연령을 고려하면, 스미스는 앞으로 보여 줄 것이 더 많은 학자다. 감히 예상컨대, 그의 활동 무대를 감안하면 비록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다루어지긴 하겠으나, 수년 내로 스미스의 인간학이나 세속화에 대한 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철학에 대한 접근법, 곧 교회를 위한 철학 활용법 등이 종교철학 내지 신학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활발하게 다뤄질 날이 곧 도래할 것이며(실제로 현재도 그런 시도가 미미하게나마 나타나고 있다)9), 더 나아가서는 실제 교회의 현장에서 그의 이론이 적용되는 사례가 지금보다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예상은 그가 단지 학계의 철학자로 머무르기보다 교회를 위한 철학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실천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별히, 그가 의도하는 철학이 그저 학자들만의 고담준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이 땅의 모든 계층의 신자들에게 제공되는 지침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큰 현장성을 갖는다. 특별히 현대 사상에 대한 정체불명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거나 예전의 의미를 망각해 버린 복음주의-개혁주의 교회에 속한 신자들에게 이 재기 발랄한 철학자의 제안은 그 자체로 큰 선물이다. 부디 향후 더 많은 독자들이, 스미스의 여러 저작을 통해서, 교회를 사랑하는 철학자가 제안하는 이런 여러 실험적 제안들에 깊이 관여해 보길 바란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 5월 21일자 글인  <‘교회를 위한 철학자’ 제임스 K. A. 스미스: 현대 철학의 맛과 공교회 예전 습속을 잊은 복음주의자에게 도래한 선물>을 수정한 것입니다.]

각주
1) 이 단락의 내용은 주로 https://calvin.edu/news/archive/faculty-profile-james-k-a-smith를 참조했다.
2) 제임스 스미스, 「칼뱅주의자는 춤추면 안 되나」, 『크리스채너티투데이』(2010년 1월호). (http://www.ct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643). 꺽쇠 괄호는 첨가.
3) James K.A. Smith, “The Logic of Incarnation: Towards a Catholic Postmodernism,” in The Logic of Incarnation: James K.A. Smith’s Critique of Postmodern Religion, eds. Neal DeRoo and Barian Lightbody (Eugene: Pickwick, 2009), 5.
4) 종교와 리오타르를 연관시킨 더 탁월한 연구로 다음 문헌을 추천한다. Liven Boeve, Lyotard and Theology (London and New York: T&T Clark, 2014).
5) 이런 점에서 나는 다음 두 권의 책을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하나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거)가 쓴 『전례의 정신』, 정종휴 역(성바오로출판사, 2006)이고, 다른 하나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 전례 신학에 관한 탐구』(God We Worship: An Exploration of Liturg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15)이다. 전자는 좀 보수적이긴 해도 가톨릭 전례의 타당성을 공교회 및 공의회 정신에 비추어 명확하게 풀어냈고, 후자는 개혁파 교회의 전례의 성격을 칼뱅신학에 의존하는 가운데 잘 풀어냈다. 양자를 통해 우리는 가톨릭 전통과 개혁파 개신교 전통에서 각기 보여 주는 전례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6) 마르코 스프리치(Marco Sprizzi), 『앙리 드 뤼박: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박성희 역(부천: 부크크, 2018), 175.
7)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 『일치의 성사』, 조규만·조규홍 역(왜관: 분도출판사, 2013), 19.
8) 이 주제에 관한 탁월한 논의로는 다음과 같은 문헌이 있다. Jean-Yves Lacoste, Expérience et absolu: Questions disputées sur l’humanité de l’homme (Paris: Presses Universitaire de France, 1994).
9) 실제로 각주 3에서 인용한 The Logic of Incarnation: James K.A. Smith’s Critique of Postmodern Religion은 스미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비판과 현장 사역자들의 실천적 적용에 대한 고민을 담은 스미스 연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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